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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을 지나다 보면 동상 하나를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동상에 관심 없이 제 갈 길을 바삐 간다. 유독 다른 곳에 있는 동상과는 달리 사람들의 눈길 한번 받지 못하는 이유는 주변을 둘러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동상 주변의 많은 노숙자에게 풍기는 악취로 시민들이 불편함을 느끼고 걸음을 재촉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울역 앞에 있는 동상의 주인공은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독립운동가 강우규 의사로 가벼이 보고 넘어갈 분이 아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박경리의 소설 '토지'에 강우규 의사가 실명으로 나오며, 역사교과서에도 의거 활동을 펼친 독립운동가로 소개되어 있다. 

 

강우규 의사는 1855년에 평안남도 덕천군에서 가난한 농부의 막내로 태어났지만, 부모가 일찍 죽는 바람에 시집간 누이의 집에 얹혀살며 눈칫밥을 먹으며 자라야 했다. 나이차가 많이 나는 결혼한 누이의 집에서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럴 경우 사랑을 받지 못해 탈선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지만, 강우규 의사는 가족들에게 충분한 사랑을 받으며 올바른 청소년기를 보낸 것 같다. 그런 짐작을 가능케 하는 이유 중 하나가 형으로부터 한의학을 배웠다는 것이다. 여러 형제들의 도움 속에 성장한 강우규 의사는 의학지식을 바탕으로 돈을 많이 벌면서 자수성가한다. 

 

1883년 함경남도 흥원으로 삶의 터전을 바꾼 강우규 의사는 한약방을 통해 돈을 벌면서도 쓰러져 가는 나라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늘 고민했다. 기독교인이었던 강우규 의사는 마을에 학교와 교회를 세워 민족의 힘을 키우는 일에 매진했다. 하지만 쓰러져가는 국운을 잡을 수는 없었다. 결국 1910년 나라를 빼앗긴 후 강우규 의사는 나라를 되찾기 위해 독립운동에 전념하고자 뜻을 세운다.

 

강우규 의사는 일제의 감시와 탄압으로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몇 년 동안 간도와 연해주를 돌아다니며 독립운동의 기반을 세울만한 곳을 찾았다. 독립운동의 근거지로 길림성 요하현을 선택한 강우규 의사는 1915년 모든 재산을 가지고 이주했다. 이곳이 신흥동(또는 신흥촌)이다. 강우규 의사의 도움을 받았던 많은 이와 독립의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신흥동은 1년 만에 100여 호가 넘는 큰 마을로 성장한다. 100여 호라면 대략 500~700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든 것으로 강우규 의사의 인품을 엿볼 수 있다.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에 가족을 이끌고 타국으로 이주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님을 생각해본다면 많은 사람들이 신흥동으로 이주했다는 것은 강우규 의사의 평소 타인을 위한 삶을 살아왔음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다.

 

독립운동 기지를 만들기 위해 1910년에서 15년까지 만주와 연해주를 돌아다니던 강우규 의사를 소설가 박경리는 '토지'에 실으며 독립을 향한 강우규 의사의 뜻을 대중에게 알리고 싶어 했다.

 

 

신흥동에서 광동학교를 세워 교육사업을 펼치면서, 대한 국민 노인 동맹단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을 지원하던 강우규 의사는 3.1 운동 이후 자신이 직접 독립운동의 현장으로 뛰어들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3.1 운동 당시 국민들의 독립 의지를 하나로 모을 구심체가 없고, 일제의 탄압과 문화통치라는 기만적인 식민통치 방식에 답답함을 느끼던 강우규 의사는 새로운 부임하는 사이토 총독을 제거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강우규 의사는 의거 활동을 위해 바지 속에 폭탄을 몰래 감추고 국내로 들어와 최자남, 허형과 남대문역(현 서울역)에서 거사 준비를 마친 뒤, 1919년 9월 2일 오후 5시 사이토 총독에게 폭탄을 던졌다. 

 

폭탄은 사이토 총독을 죽이지는 못했지만 근처에 있던 37명의 일본 경찰과 신문기자들을 죽이거나 다치게 했다. 일제는 폭탄을 던진 사람이 노인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엉뚱한 곳에서 범인을 찾다가 16일이 지난 뒤 재거사를 준비하던 강우규 의사를 체포한다. 

 

체포된 강우규 의사는 한순간도 비굴하게 일제에 굴복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일제는 당당한 강우규 의사를 존중하여 피고라는 용어 대신 강 선생 또는 영감님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존중과 현실은 달랐다. 강우규 의사는 일제에게 사형선고를 받고 1920년 11월 29일 66세의 나이로 순국하게 된다.

 

순국하기 전 강우규 의사가 우리 청년들에게 남긴 말을 잠시 들어보자.

 

“내가 죽는다고 조금도 어쩌지 말라.

내 평생 나라를 위해 한 일이 아무것도 없음이 도리어 부끄럽다.

내가 자나 깨나 잊을 수 없는 것은 우리 청년들의 교육이다.

내가 죽어서 청년들의 가슴에 조그마한 충격이라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소원하는 일이다.

언제든지 눈을 감으면 쾌활하고 용감히 살려는

전국 방방곡곡의 청년들이 눈앞에 선하다."

 

자신이 한 행동이 독립을 위한 조그마한 초석이 되기를 원했던 강우규 의사의 바람은 이후 수많은 젊은이들이 일제의 부당한 식민지배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초석이 되었다.

 

우리는 일제강점기 의열 활동을 한 인물들로 이봉창, 윤봉길, 나석주 등을 기억한다. 그러나 이 분들 외에도 누구보다 젊은 열정과 패기를 가지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강우규 의사를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서울역 앞 강우규 동상이 세워지기까지 4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설치 과정이 어려웠던 점도 있으나, 지금은 동상이 제대로 관리가 되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동상 주변의 노숙자들이 풍기는 악취와 안전에 대한 불안감으로 동상에 가까이 가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동상의 목적이 많은 사람들에게 교훈을 주기 위한 일이라면 지금보다 관리가 잘 되었으면 좋겠다. 

 

그 방법으로 서울로 7017(구 서울역 고가도로)과 문화역서울 284(구 서울역 청사)를 연계하는 방법이 모색되었으면 좋겠다. 그럼 자연스럽게 강우규 의사를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으며, 동상의 주변 환경도 개선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강우규 의사의 뜻과 행동이 널리 알려졌으면 좋겠다. 이 글을 읽은 분 중에 혹시라도 서울역을 지나갈 일이 있다면 주변 사람들에게 강우규 의사의 이야기를 간단하게라도 해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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