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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악산

 

백악산을 내려오면서 바라본 모습입니다. 여기에 오르기 전만 해도 백악산을 인왕산으로 혼동했거나 아니면 단순한 산봉우리로만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제 이곳을 다녀갔으니 누군가에게 백악산을 가리키며 산에 대해 말할 수 있겠죠. 책 속의 글과 사진으로만 익히고 배우는 것은 분명 한계가 있습니다. 직접 가서 보고 느끼고 익혀야 오롯이 나의 것이 된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됩니다.

 

 

축조 시기가 다른 서울 성곽

 

서울 성곽은 태조가 서울을 방어하기 위해 조성한 18km에 달하는 긴 성곽입니다. 백악산-인왕산-남산-낙산을 연결하며 낮은 곳에는 흙으로 만든 토성으로 만들고, 높은 곳은 돌로 쌓은 석성으로 만들었습니다. 조선이 얼마나 체계적인 나라였는지를 알려주는 것이 성곽을 97구간으로 나누어 공사가 진행되었고, 118,049명이 동원되었음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조선이 왜 기록의 나라이며, 600년에 가까운 긴 시간 동안 유지되었는지 이해가 됩니다.

 

서울 성곽은 세종, 광해군, 숙종, 영조 대에 대대적으로 성벽을 고쳐 쌓았기에 조선 시대의 건축기술을 한눈에 볼 수 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높기도 합니다. 사진에서 가운데의 성곽은 세종대왕 때 축성한 것이고,오른쪽은 숙종 때에 축조된 것입니다. 한눈에 보기에도 구별할 수 있을 정도록 쉽습니다. 성곽 중 유독 새하얀 색을 보여주는 것은 최근 보수작업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성곽이 보수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조선이 무너지고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많은 성곽들이 보존되지 못하고 허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중 가장 큰 원인이 일본 황태자가 조선을 방문하면서 성곽이 비루하다는 명목으로 없애버리라 했기 때문이니 통탄을 금치 못할 일인 거죠. 성곽이 가지고 있는 가치를 제대로 보지 못한 일본 황태자, 그가 비루먹었다고 말하고 싶네요.

 

 

 

여장

 

조선 시대의 성곽 위의 담장을 여장이라고 합니다. 여장에서 총을 쏠 수 있는 구멍이 3개 있는데 이를 1 타라고 합니다. 가운데 구멍은 근총안이라고 하여 성곽에 오르려고 근접하는 적을 향해 총을 쏠 수 있도록 비스듬히 아래쪽으로 향해 있습니다. 좌우의 구멍은 원총안이라고 하여 멀리서 다가오는 적을 향해 총을 쏠 수 있도록 과학적이고 체계적으로 축조해놓았습니다. 적은 병력으로도 많은 적을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도록 고안한 우리 선조들의 과학기술과 지혜를 엿볼 수 있습니다.

 

 

촛대바위

 

성곽 1코스를 걷는 도중 촛대바위를 지나가게 됩니다. 촛대바위라고 표시해 놓은 곳에서 아무리 쳐다봐도 왜 촛대바위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세월이 흐름에 따른 풍화작용으로 변화된 것인지 아니면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쇠말뚝을 이곳에 박으면서 변형된 것인지 알 수는 없습니다.

 

일제 강점기 시절 우리나라의 지맥을 끊기 위해 곳곳에 쇠말뚝을 많이 박아놓은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실제로 쇠말뚝 자리를 보면서 일제가 영원히 한국을 지배하려 했던 의도를 느꼈습니다. 우리 주변에 조금만 눈을 돌리면 일제의 상처가 많이 남아있음에 몸서리치게 됩니다.

 

 

말바위 조망명소

 

말바위에 오르게 되면 서울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조망명소가 있습니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서울의 모습은 높은 빌딩이 아니라 6~70년대의 서울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서울을 바라보며 이 곳이 왜 말바위인지를 한참 고민했습니다. 보통 지명 이름은 지형이 가진 생김새를 두고 불리어지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말바위를 오르내리며 아무리 둘러봐도 말처럼 생긴 바위가 없었습니다. 검색을 해도 이곳이 왜 말바위 인지 잘 나오지 않아 한참을 헤맨 끝에 말바위 유래가 말을 끌고 산을 넘어가던 사람들이 이곳에서 한숨을 돌렸다해서 붙여졌다는 해석을 찾았습니다. 검색 결과를 보면서도 굳이 산 능선을 말을 끌고 올라와야 했는지 의문을 지울 수 없습니다.

 

 

말바위 쉼터

 

제가 다니던 대학에 궁합 나무가 있었습니다. 사진 속 나무와 같은 모양을 가지고 있는데 남녀가 같이 앉을 수 있으면 궁합이 아주 좋다는 전설이 내려오죠. 이곳에서 쉬는 사람들에게 저 나무는 어떤 의미가 부여될까 잠시생각해봅니다.

 

 

 

숙정문

 

숙정문은 사대문으로 북문에 해당합니다. 숙정문은 다른 사대문과 다르게 건립되자마자 많은 우여곡절을 겪게 됩니다. 태종 때 풍수지리가였던 최양선이 자하문과 숙정문은 경복궁의 팔의 역할을 하기에 문을 내면 안 된다고 건의를 받아들여 이후 조선시대 대부분 문을 닫아둡니다. 그 이후 숙정문은 사람들이 왕래하는 문으로서의 기능보다는 상징적인 기능으로만 주로 사용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가뭄이 심할 때 음양오행에 따라 음을 상징하는 숙정문을 열고 숭례문을 닫아두었습니다. 그 외에도 숙정문을 열어두면 음의 기운이 서울로 내려와 여자들의 품성이 음란해진다고 경계하기도 했습니다. 조선이 성리학의 나라로서 여성의 활동을 제약하는 부분이 늘어나면서 만들어진 이야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숙정문은 조선이 끝나고 일반인들이 왕래하며 문의 기능을 다시 되찾은 것도 잠시였습니다. 1968년 1.21 사태 이후 다시 문이 걸어 닫히면서 사람들의 통행이 막히게 됩니다. 1968년으로부터 38년이 지난 2006년 다시 사람들이 왕래하게 되었으니 숙정문의 운명도 기구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숙정문 잡상

 

창의문은 사소문이고 숙정문은 사대문이라 잡상의 크기와 개수가 다른 것인지 아니면 1976년 숙정문이 복원될 때 제대로 고증되지 않은 것이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둘의 차이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얼핏 보면 선조들의 건축물들이 모두 같아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자신만의 색채와 이야기를 가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서울 성곽

 

숙정문을 뒤로하고 걸으면서 성벽을 다시 바라봅니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성벽의 색깔이 다름을 다시 보게 됩니다. 성곽의 색이 어두울수록 많은 일들을 함께 겪으며 여기저기 떨어져 나가 새로 덧 데기도 했지만 오랜 세월 손 때가 묻어있어 우리에게 더욱 소중한 물건처럼 느껴집니다. 더 많은 시간이 흐르고 나면 현재 복원해 놓은 부자연스러운 성곽도 자연스럽게 기존의 성벽과 어우러지겠죠.

 

 

 

말바위 안내소 눈사람

 

말바위 안내소를 지키고 있는 눈사람을 보면서 든든한 장군을 연상했습니다. 짙은 눈썹을 통해 강인하면서도 옅은 미소를 볼 때 마음은 부드러운 눈사람이라는 상상을 입혀봅니다. 누가 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잘 만들었습니다. 칭찬해드리고 싶네요.

서울 성곽길을 걸으면서 복잡한 도시를 떠나 시간탐험을 제대로 했나 봅니다. 성곽길의 마지막 구간을 지나면서 현실로 돌아가기 위해 부지런히 걸음을 재촉하는 저의 모습을 봅니다.

 

 

 

와룡공원으로 가는 길

 

와룡공원으로 혼자 내려가면서 설경을 감상합니다. 1000만이 넘는 복잡한 서울 속에서 몇 시간을 홀로 걸으면서 많이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성곽길에서 사람들을 만나지 못하자 불안해지고 초조 해지기 시작합니다. 다시 내가 있던 복잡한 서울 도시로 들어갈 시간이 되었음을 인식하게 됩니다. 혼자만의 시간이 겨우 반나절밖에 보내지 않음에 사람들이 그리워집니다. 그래서인지 저의 발걸음은 더욱 빨라집니다. 와룡공원으로 나와 마을버스를 타고 성균관대를 지나 도심에 접어들면서 하루 중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고민합니다. 저녁으로 무슨 음식을 먹을지 고민하는 일상으로 곧 되돌아옵니다. 나만의 시간이 사라지는 것에 대한 허전함이 안도감과 일상에서의 무덤덤함으로 곧 대체됩니다.


그래도 가끔 혼자 걸으며 내가 좋아하는 역사를 만나는 시간을 또 기다려봅니다. 일상에서 잠시나마 벗어나기에 더 달콤한 시간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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